고담(古談) 1:
옛날 이 마을에 용한 점쟁이가 살았다더구나

항아리 골에 들어서자 수리산을 바라보고 동남쪽으로 십 리쯤을 쭉 걷다 보면 흰 깃 발에 卍(만)자가 보일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해가 산 위에 솟을 때쯤 붉은 흙으로 빚어 만든다는 독과 항아리들이 가득 쌓인 항아리 골 입구에 들어섰다. 걷다 지친 나그네에게 시원한 식혜를 건네주시는 한 할머니께 여쭈었다.

- 이 동네에 용한 점쟁이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 어디 한둘이랴? 집집이 다들 단골레가 있는데. 그리 찾으면 여서는 누군지 못 찾아.
- 그래도 워낙 신통해서 멀리서들 찾아온다 하던데요.
- 아, 글쎄 단골레마다 다 신통하고 잘 본다고 하지. 저 바로 아래에도 기가 막히게 알아 맞히는 집이 몇 있지.
- 수리산 가까이에 있다 들었습니다. 그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겠지요.
- 여기서 가까이도 많은데 뭣 하러 쉬지도 않고 더 가려나 그래. 꼭 찾아야겠으면 더우니까 쉬엄쉬엄 가보게.

길을 떠난 지 반나절이 지났고, 그사이 드문드문 붉고 흰 깃발이 대나무에 걸려 흔 들리고 있었다. 수리산을 마주 보며 산줄기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흰 천에 붉은색 의 卍 자를 새긴 깃발이 보였다.

이 집이로군,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바로 그 옆 골목에 또 한 집이 눈에 띄었 고, 놀라서 주위를 둘러 보니, 적어도 서너 채의 비슷한 깃발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 어이쿠, 이런.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로군. 첫 번째 집에 먼저 들어가 볼까.

열려 있는 문틈 사이 붉은 꽃무늬의 고쟁이를 입은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 서서 무언가 주문을 외듯 소리 내어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끼익.
- 저어, 무얼 좀 여쭙고 싶습니다.
- 어서 들어와.
- 소문으로 듣던 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 뭘 물으러 왔어?
- 저는 그저 미래가 궁금합니다.
- 좀 더 크게 말해. 자네의 조상들이 한꺼번에 나한테 얘기들을 쏟아 붓는 통에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려.

- 미래, 미래가 궁금합니다.
- 뭐가?
- 미! 래! 말입니 다.
- 자네 조상 중에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이 있구먼. 지금 산천 계곡 옆에 누워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네한테 가지 마라, 가지 마라 소리치고 있네 그려. 그럼.
- 네? 제 조상이요? 걸어왔어?
- 네.
- 그리 혼자 걸어 다니지 마. 안 좋습니까?
- 오늘 마침 고사를 지내서 부침개와 과일이 남았는데 좀 먹어볼 텐가?
- 아니요, 괜찮습니다.

- 어서 먹어.
-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
- 네.

- 안 변해.
- 네?
- 그래도 나빠지진 않을 거야. 5년, 아니 4년쯤 있으면 길이 넓어지겠지. - 네에. 안 변하는 게 좋은 겁니까?
- 변해야지. 암, 변하는 게 이치에 맞지. 근데 쉽게 안 변해. 기다려.
- 어디에서요?
- 연락이 닿아. 찾아와.

골목 어귀가 어둑해질 무렵, 이번엔 두어 채를 지나 조금 아래를 향해 걸려있는 흰 깃발을 따라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쉴 새 없이 짖어대는 자그마한 개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섰다.

- 뉘시오?
- 이 마을에서 용하다 소문난 분을 찾아왔습니다.

방 안에 비스듬히 누워 고개를 돌린 것은 젊은 처자였다.

- 난 이곳에 온 지 열흘이 채 안 되었소. 소문난 사람 찾아온 거면 잘못 오셨소. -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요?
- 오래된 큰 신들을 찾아보소. 난 아직 여기 지리도 잘 모르니.

발걸음을 돌려 맞은편에 보이는 비슷한 깃발의 집으로 들어섰다.

- 저어.
- 무슨 일이신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중년의 한 남자가 물었다.

- 점을 보고 싶습니다.
- 들어와 앉아보시게.
- 제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아시겠습니까?
- 자넨 날 시험하고 싶은겐가?
- 아닙니다. 해가 완전히 기울기 전에 답을 얻어 돌아가고 싶어서 그럽니다.
- 신의 말씀은 그리 내놓으라 하듯 다그쳐서 얻는 게 아닐세.
- 죄송합니다. 그저 앞날이 알고 싶어서.
- 앞날?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물으면 어찌 점을 보나?
- 달리 어찌 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이쪽 낮은 곳은 죽었고, 저기 높은 쪽은 살아있으니 성한 곳이 더는 허물어지지 않아야 하네.
-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이대로 좋다는 겁니까?
- 이대로 좋은 것이 세상에 어디 있나. 좋지 않다고 바꿀 수도 없을 걸세. 섣불리 판단하지 말게나. 지금 내 말도 섣불리 옮기지 말란 말일세.

갑자기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이제 그만 돌아가 보시게. 난 할 일이 생겼네.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 빨랫줄에 널려있는 색색의 옷가지들을 걷어내기 시작할 때,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신을 신고 길을 나섰다.

- 비가 오는데 어찌 돌아갈 참인가?
- 괜찮습니다. 저는 언제 비가 올지 몰라서 한결같이 우산을 지니고 다닙니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음을 옮기자 저 멀리 하늘에서 두어 차례 번개가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