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언어 - 고려말

김병학 (시인, 작가. 저서로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1,2』, 시집 『천산에 올라』 외 다수)

고려말은 사할린 지역 한인을 제외한 구소련 지역 거주 고려인들이 두루 사용하는 한국어 방언 중 하나다. 고려말이라는 명칭은 재소고려인들이 자기들이 쓰는 모국어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투사하여 스스로 부여한 이름이며 이에 대한 개념은 1937년 강제이주 이후, 특히 1991년 구소련 붕괴 이후에 뚜렷이 형성되었다.

고려말은 한반도 동북부 지방의 방언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고려인들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함경북도 지역에서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따라서 당시 그들이 사용했던 함경북도 방언이 후손들에게 전승되어 고려말이 된 것이다. 물론 고려인 중에는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도 포함되어 있는 만큼 그들이 쓰던 한반도 여러 지역 방언들도 재소고려인 언어생활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고려말에는 그런 측면들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고려말은 방언의 근원과 이주의 역사가 동일한 재중국 교포들의 말과도 거의 일치한다.

20세기 초반까지 연해주에 집거해 살던 고려인들은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모국인 한반도와 모든 물리적 연계가 끊어졌고 그 기간은 반세기가 넘게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오랜 고립생활은 고려인들이 사용해오던 옛 우리말 어휘들이 거의 변형이 되지 않은 채 화석처럼 잘 보존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고려인들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 살면서 독특한 우리말 단어를 새로 만들어 내거나 러시아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해 씀으로써 우리말 어휘를 더욱 풍부하게 하기도 했다. 반면 오랜 러시아화의 영향으로 모국어가 점차 잊혀져갔고 동시에 모국어 발음에 왜곡이 일어나고 러시아어의 차용이 두드러지게 늘었으며 또한 러시아어와 우리말이 결합되어 한 단어를 이룬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러시아화의 경향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데 모국어로 문학작품을 쓰는 고려인 작가들은 한반도의 중심지역에서 쓰이던 모국어의 올바른 표기법 및 정서법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고려인이 발간하는 신문이나 지금까지 고려인 한글문학작가들이 펴낸 작품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당시 한반도에서 제정된 올바른 우리말 표기법을 따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재소고려인 방언 즉 고려말의 발음이나 어휘 및 표기상 특징을 몇 가지만 개괄적으로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1. 두음법칙
고려인이 쓰는 말에는 두음법칙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연령대가 높을수록 두음법칙은 잘 지켜지고 반대로 연령대가 내려가면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예) 로동자 (노동자)

2. ‘ㄱ’ 곡용
사할린을 제외한 구소련 전 지역의 고려인들이 쓰는 방언에 두루 ‘ㄱ 곡용’(또는 ‘ㄱ 첨가’) 현상이 나타난다. ‘ㄱ 곡용’은 대부분 명사와 동사에 집중되어 있지만 다른 품사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예) 돌구다(돌리다) ; 딸구어라(따라라 또는 따라잡아라) ; 얼구다(얼리다) ; 불구다(불리다) ; 굼기(구멍) ; 걸금(거름) ; 남기(나무) ; 갈기(가루) ; 벌기(벌레) ; 벌거지(버러지)

3. ‘ㅂ’ 불규칙 용언
‘ㅂ’불규칙 관형사를 격변화 시켜 발음할 때 대개 ‘ㅂ’이 탈락하지 않고 규칙변화 한다.
예) 즐겁은(즐거운) ; 아름답은(아름다운) ; 곱은(고운) ; 귀엽은(귀여운) ; 불법다(부럽다)

4. 구개음화
러시아어에 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나는데 고려인들의 발음도 그 영향을 받아 러시아식 구개음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또 러시아어와 관계없이 우리말 고유의 구개음화 현상을 보이는 단어들도 있다.
예) 상사지요(상사디요) ; 에헤야지야(에헤야디야) ; 지생(기생) ; 질(길)

5. ‘받침ㅇ’ 발음의 ‘ㄴ’ 발음화 현상
러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고려말의 ‘받침ㅇ’발음이 점차 ‘ㄴ’발음으로 변했다.
예) 연천아리랑(영천아리랑) ; 단초(당초) ; 존달새(종달새) ; 다전한(다정한)

6. 마지막 음절 종성의 ‘ㄴ’과 ‘ㅇ’의 탈락 현상
고려인들은 마지막 음절의 종성이 ‘ㄴ’이나 ‘ㅇ’으로 끝나는 단어를 발음할 때 대개 그 마지막 음절 종성 ‘ㄴ’과 ‘ㅇ’을 탈락시키고, 탈락시킨 그 음절을 길고 강하게 발음한 다음 거기에 ‘약한 ㅣ’를 첨가해 발음한다.
예) 사이(산) ; 정시(정신) ; 나(나이) ; 사두이(사돈) ; 자이(장: 된장)

7. ‘ㅎ’ 발음의 ‘ㄱ’ 발음화 현상
러시아어의 영향으로 한국어의 ‘ㅎ’발음이 약화되어 ‘ㄱ’으로 발음된다.
예) 악수를 가니(악수를 하니) ; 관고, 송고 등((사람 이름) 관호 송호 등)

8. 방언 및 고유의 단어
방언의 경우 대부분이 함경도 방언이지만 다른 지역 방언들도 일부 사용된다. 고유의 단어는 고려인들이 사는 지역 등과 관련되어 새로 생겨난 단어로서 방언으로 볼 수도 있다.
예) 파리(썰매) ; 불법다(부럽다) ; 놀구자리(노고지리) ; 나부(나비) ; 판(전혀, 아주) ; 바쁘다(힘들다, 어렵다) ; 성수나다(신나다) ; 헐하다(쉽다) ; 배뿌기(배꼽) ; 동삼(겨울) ; 메커리(미투리, 짚신) ; 우둔도깨비(미련한 사람) ; 보토리(혼자 사는 사람) ; 까바들다(덤벼들다, 대들다) ; 가마치(누룽지) ; 허잡이(허수아비) ; 아시(첫) ; 색경(거울) ; 서답(빨래) ; 지러이(간장) ; 고본질(계절농사) ; 얼구배(나무열매이름) ; 가댁이(쟁기) ; 비기군(경쟁자) ; 자고배 또는 자구배(다문화인, 혼혈인) ; 마우재(러시아인) ; 싸캐(카자흐인) ; 베캐(우즈베크인) ; 삽하다(위험하다)

9. 러시아어에서 들어온 외래어
예) 꼰끼(스케이트); 쓰뻬꿀랸트(야매꾼) ; 비지깨(성냥) ; 메드레(양동이) ; 핀자깨(신사복 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