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에서 온 色다른 기호(記號)의 전시
-모험가, 관광객, 레지스탕스:이소영, 박형지, 임상빈, 에이 코, 미야 쵸.

백용성

1. 경계에서의 시선들

작가(예술가)는 언제나 이방인 혹은 아웃사이더의 공기를 품고 있다. 물론 그 스펙트럼은 극단적 아웃사이더나 기인의 모습에서부터 평범한 동네 아저씨의 모습까지 광범위하다. 하지만 ‘예술가’는 언제나 숙명적인 낯섦의 시선을 갖게 마련, 또 그것이 예술가를 예술가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내에서 통할 일이다. 외국이라면 어떨까? 아주 오래 산 나라가 아니라면 지리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낯섦이 예술가의 시선보다 더 압도적일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원주민의 느낌으로 파고들지 못하거나,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고, 여행자로서 이국적이거나 심지어 관광객으로써 느끼는 낯섦 사이에서 어슬렁거릴지도 모른다. 즉 원주민 되기와 이방인 되기의 경계에 놓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학자 에두와르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말하듯 우리는 ‘원주인’을 ‘우리의 시각’에서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완전히 원주민의 시각에서 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그러기위해선 원주민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경계에서 작가들이 작업한 결과물들이다. 한국 참여 작가인 박형지, 이소영, 임상빈은 1개월가량 미얀마에 레지던스로 참여했었고, 이번 전시에 미얀마 작가인 에이 코, 미야 쵸 작가의 작업들도 포함됐다. 한국의 세 작가 모두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원주민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를 포착하고 있다.

2. 실재와 기호 사이의 경계들-혹은 아이콘들

임상빈 작가의 아이콘 작업과 간단한 설치는 상대적으로 원주민 되기와 이방인 되기의 중립적 위치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먼저 아이콘_기호가 그것들이다. 34일간의 기록을 그는 210여개의 방대한 아이콘 형태로 포착하고 결정화한다. 미얀마를 돌아다니면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들을 아이콘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원주민에 대한 즉각적 해석(편견을 포함해)을 지연시키고, 지나친 관광모드를 배제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그리고 퍼스 기호학이 말하는 것처럼 그의 아이콘들은 유사성에 기초한 도상기호를 칭하는 용어이지만 하지만, 임상빈 작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접성, 인과관계와 연관되는 지표기호(연기는 불이 났다는 지표기호이다), 상징(우리가 쓰는 언어와 같은 관습이거나 논리적 관계들) 모두를 포괄한다. 예를 들어 ☂ 라는 기호는 우산을 즉각 연상시킨다.(도상) 하지만, 작가는 미얀마에서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해야한다는 지표기호나 우기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해석해낸다. 이러한 혼합된 아이콘 작업은 관객들에게 어떤 것들은 친숙하면서도 다른 것들은 상당히 모호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이 <34 days in Myanmar>가 주는 미학적 효과들이다.

관람 중에 일일이 그 내용을 확인하면서 지나가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몇몇 아이콘에는 시선이 머물게 된다. 즉 예를 들어 ⧛,  , 는 처음에는 모호하다가 안내문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상당히 장난기 있으면서도 재기 발랄한 표현들이 된다.(순서별로 라면요리, 영수증체크, 들러붙는 남자를 ‘상징’한다) 이렇듯 아이콘들은 익숙한 도상들과 함께 상징화된 형태들로 가지런히 표현되는 데, 그 사이에 실제 작가의 경험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거나 ‘읽게’된다.

이건 여행객의 것인가? 그렇다. 원주민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행객의 것이지만, 확실히 일반 여행객의 것은 아니리라. 왜냐하면 장황한 사진이나 말들이 없기 때문이고, 간략히 간추려진 도상들만이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행위(다이어리)의 과정이면서도 이방인과 원주민의 경계를 새롭게 해석해보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고 새로운 ‘여행으로의 초대’일 것이다.

3. 소멸과 성장의 시간놀이.

그렇지만 도상과 자의적 사징들의 표현을 떠나, 미얀마의 풍경으로 침투해 들어가고자 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수만 가지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박형지 작가의 비디오작업 <무제>는 독특한 시간놀이를 보여준다. 제법 우렁찬 열대 정원을 배경으로 야외에 봉숭아 그림이 설치된다. 그리고 그 앞에 뿌려진 봉숭아 씨. 예상할 수 있겠지만, 씨는 자라 봉숭아로 쑥쑥 자라나고, 나무에 그려진 그림은 퇴색될 것이다. 비디오는 이를 무심히, 고즈넉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말한다. 많은 그림들을 폐기처분할 때, 그것을 그리는 시간에 비해 지나치게 짧게 처리된다고. 캔버스하나를 버리는 건 1분도 걸리지 않으니 말이다. 누군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걸 버리냐고. 팔라고, 혹은 보관해두라고, 아깝지 않냐고. 그게 그리 쉽지 않은 현실이다.

현대는 부정적이거나 비생산적인 것에 대해 지나치게 무심하다. 오직 앞으로!라는 프로파간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쉽게 버려지는가. 우리가 공들여 만든 어떤 시간들의 결정체들이 오직 그때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기 일쑤다. 사랑과 이별얘기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지나치게 짧게’ 처리된다. 대표적인 게 현대의 장례식장이다. 한 사람의 인생과 죽음, 그 죽음에 대한 애도가 얼마나 위생적이고 깔끔하게 처리되는가? 바쁘기 때문에 잠깐 들르고 가야하는 조문객들은 또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박형지 작가는 이러한 시간의 폐기처분에 저항한다. 천천히 지나칠 정도로 천천히, 사라져가고 퇴색되어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준다. 동시에 천천히 싹이 나고 커나가는 봉숭아의 자연스러운 ‘성장’의 시간놀이도 진행된다. 아마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저속카메라로 2분 이내에 그 모든 걸 보여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익숙해지고 메마른 우리의 시간감각을 작가는 저항하고 넘어서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4. 인터뷰와 기이한 관찰

이소영 작가는 사람을 택했다. 당연하다. 외국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망만큼 자연스러운 게 있으랴. 그런데 그 접근법은 일반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이다. ‘당신은 무엇을 빼앗기고 있느냐?’. 우문현답이든 현문현답이든 그 대답들이 거침없다. 그러고 보니 현문현답이리라.

<빼앗기는 무엇>이라는 비디오에 나오는 젊은 친구들은 할 말이 많았다. 휴학 중에 샹들리에 설치 아르바이트를 했던 한 청년이 당했던 이야기나,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백수로 지내는 청년이 건네주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어째보면 한국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지만, 자본주의적 인간관계가 모세혈관처럼 미얀마 곳곳을 채워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동시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아주머니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 혹은 전통적인 불교문화가 여전히 일상에 남아있다는 거다. 거기엔 미얀마 근대화과정에서의 시간차들이 교차하고 있다.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갖고 흐름은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그 질문을 푸는 접근이 바로 ‘뺏고 빼앗김’의 관계를 보자는 것이다. 한국 또한 얼마나 많은 뺏고 빼앗김의 역사와 비극의 역사가 있었던가. 그러한 공통의 맥락 속에서 차이를 마주하고자 하는 노력이 경계에선 작가의 좋은 태도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너의 영역>에서의 길거리 개들에 대한 독특한 관찰도 미시-사회학적 시선일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의 태도는(고양이보다 더) 분명히 그 사회의 어떤 색깔이나 정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개나 소들은 인간의 태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개나 소나 사람이나 하등 다를 게 없다는 눈치들이다. 초월의 눈짓이다. 한국 길거리에서 개는 어떨까?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미얀마와는 다를 것이다. 경계나 의심의 눈초리, 아니면 애교를 떨고자 하는 몸짓이 어딘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개들은 이미 자신이 사랑받는 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눈치다. 하지만 미얀마는? 개들은 무언가에 ‘관심’이 있고, 조금 분주하지만 경계나 지나친 애정에의 요구는 없거나 절제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개들의 모습에서 미얀마의 내면풍경을 읽게 되는 것이다.

5. 국가를 넘어서

사실 에이 코, 미야 쵸는 원주민의 입장에서 이방인의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늘 거리를 두고, 새로운 지각과 감각을 만드는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에이 코의 <깃발> 설치는 이러한 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아시아의 여러 국기들을 박스형태에 이미지화하고, 황량한 야외에 설치해놓았다. 사이사이 어느 나라 국기인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있고, 미지의 국가 혹은 그런 공동체를 암시하는 국기도 있다. 혹은 국기이거나 말거나인 무늬가 있는 박스들뿐일지도 모른다. 국가들의 역할이나 국가들 간의 차이들이 별 볼일 없다는 듯 아무렇게나 나열됐다. 이건 사실 아시아의 현실에 대한 경계인의 시선 자체이다.

미야 쵸의 경우는 미얀마 국내에서의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보여주는데, 과장된 미소의 마스크는 일상의 규칙을 깨트리기에 충분하다. 그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인사하며,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등 일상의 행위를 영유한다. 여기서 이방인의 공기는 인간관계의 안전한 규칙인 미소 짓기를 과장하고 고정시킴으로써 일상습관들에 균열을 내고, 묘하고 새로운 풍자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한국 세 작가들의 작업들도 그럴지 모른다. 그들의 기존작업들을 보면 느낄 수 있다. 예술가란 앞서 말했듯이 ‘영원히 스쳐가듯’하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히 스치기만 하지 않는다.

최근 아시아권의 상호 교류가 활발하다. 모두가 유럽이나 미국으로 집중됐던 과거와 사뭇 다르다. 이러한 흐름에서 예술은 어떤 방향을 모색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조심스러운 상호 접근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서로의 문화를 알아나가야 한다. 거기에 예술가의 특권적 위치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문화알기는 단지 음식문화에의 호기심이나 역사 알기, 피상적인 교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의 교차가 필요하며, 서로가 원주민 되기, 이방인 되기의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심지어 두 시선의 상호침투가 일어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앎을 넘어선 하나의 창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특유한 시선으로 서구중심의 컨템퍼러리 아트와는 다른 색을 만들어 냈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