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움직인다

이성휘

보금자리는 어떤 이에게는 의식주의 하나로 그칠 수 있지만, 외부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보호막이자 은신처, 또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몽상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장소는 지붕이나 담벼락 아래, 다락방 구석이 될 수도 있지만, 살고 있거나 아니면 두고 온 나라이자 고향, 또는 앞으로 가고자 하는 어디인 것이다. 유년 시절부터 해외 체류가 길고 잦았던 이소영은 이제는 삶의 거점을 대체로 서울로 할 것이 확실해 보이지만, 여전히 그는 “어디서 살지? 지금 여기가 괜찮은가? 어디에서 죽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은신처, 보호막, 보금자리로서의 집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실 이 고민은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대도시에 사는 이상 전월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고, 팍팍한 현실 조건을 벗어나 더 살기 좋은 환경에서 살아보는 것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근 시리아 내전과 이로 인한 중동과 유럽의 난민 사태로 생각할 수 있듯이 보금자리에 대한 고민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대규모 문제로도 확대된다. 역사는 끊임없이 난민의 이주를 만들어내고 있고, 동시에 난민들의 삶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겠지만, 이를 타자화하여 외면하기에는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 역시 월전세 대란, 도시재개발 등 어떤 사회적 규모로든 이주의 당사자가 된다. 이소영은 “다가올 미래에 더욱 자유롭고 빈번해지리라 생각되는 이주의 형태와 삶의 모습 속에서 국가 정체성이 더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소수민족과 소수민 공동체, 디아스포라는 어쩌면 새로운 사회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간 작가의 행로를 보았을 때, 이주와 보금자리에 대한 그의 고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어 온 만큼, 이 글에서는 그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 고민을 살펴보기로 한다.

빼앗기는 무엇

2000년대 초중반 이소영의 작업은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하는 비디오가 주를 이뤘다. (2002), (2004), <꿈꾸는 자들의 연인>(2005) 등의 작업에서 작가는 지속적으로 동화와 같은 내러티브를 만들었는데, 동화는 개인의 생애에서 가장 일찍 접하게 되는, 몽상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안내자로, 등장인물, 배경,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요소와 장치를 통해서 판타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어린 시절의 판타지를 박탈당했음에 서글퍼 할 지언정 대부분 현실과 동화를 구분하는 냉철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미래만 바라보는 현실에서 잠깐의 멈춰진 시간을 찾기 위해 이소영은 지붕 위로 올라가는 블링크새가 되기도 하고, 화려하고 멋진 가면을 여러 개 지녔지만 한없이 우울한 자신을 잊기 위해 지붕을 찾는 엘스가 되기도 한다. 이 시기 그는 결코 만나지 못하는 현실과 판타지, 이 두 세계의 평행선에 대한 불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욕망하는 판타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2000년대 중반, 이소영은 현실과 판타지의 평행선에 대한 생각을 조금 다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현실을 판타지의 박탈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고, 이 박탈은 신체적, 정신적, 개인적, 사회적 박탈, 그리고 스스로 가한 것과 당한 것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했다. (2012)는 나약한 개인이 무기력하게 신체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곰 젤리를 이용해 잔혹 동화처럼 표현한 영상이다. 이 영상에서 곰 젤리(gummy bears)는 물에 휩쓸려가고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등 외부의 힘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곤 한다. 또한 곰 젤리의 말랑말랑한 몸뚱아리는 핀셋으로 고정된 채 메스로 난도질 당하며 형형색색으로 재조립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수술이 곰 젤리를 더욱 강력한 존재로 재탄생시켜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신체적인 수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의식의 재조작이라고 한다면, 의식이 태연하게 질겅질겅 씹히고 버려지고 재조립되어 자유 의지와 판단이라고는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될 뿐이다.

2008년부터 박탈, 즉 빼앗기는 무엇에 대한 이소영의 탐구는 인터뷰 형식을 취하게 되면서 우화 형식에서 벗어나 훨씬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담게 되었다. 2008-2009년 사이 핀란드와 한국에서 연달아 제작한 <빼앗기는 것들>(2008-2009)은 사람들에게 “누군가 당신에게서 무엇을 가져간다고 하면 당신은 그들이 무엇을 가져간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인터뷰 영상이다. 이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정신, 신체, 가족관계, 사랑, 영혼, 시간, 검열, 역할, 선택, 인권, 지문, 장난감 등 여러 가지 유무형의 대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중독으로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람,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 정부가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다고 주장하는 사람, 어릴 때 자신이 가지고 놀던 인형을 보모에게 빼앗긴 사람, 이들이 말하는 것은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들에게는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었거나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최고조의 갈등일 것이다. 어떤 이는 이소영의 질문을 비껴가서 예상치 못한 역발상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러한 답변을 그는 임의로 재단하거나 선별하지 않고, 논리적 모순이 있더라도 가능하면 인터뷰이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인터뷰 방식에 대한 이소영의 기본적 태도는 2014년 한 미술잡지와 가졌던 서면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대화를 하다보면 다른 말로 샐 때도 있고, 문법에 어긋나거나 단어 선택을 잘못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침묵보다 나을 때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후 이소영의 영상은 퍼포먼스 기반에서 인터뷰 기반으로 이동하게 된다. 2012년 카자흐스탄, 2014년 미얀마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에서도 그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후손들과 미얀마 현지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특히 2009년 이후 오랜만에 다시 ‘빼앗기는 무엇’에 대해 질문한 <빼앗기는 무엇 - 미얀마 >(2014)는 영상의 형식과 인터뷰어로서의 태도에서 상당한 변화를 보여준다. 핀란드(2008)와 서울(2009)에서 행했던 인터뷰가 개별 인터뷰이보다는 배경 영상, 교차 편집 등 영상의 부수적인 장치에 신경 쓴 티가 났다면, 미얀마 영상은 인터뷰이가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그들의 스토리텔링에 귀를 기울이되, 작가가 어쩔 수 없이 이방인으로서 미얀마를 대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유럽에서 가장 복지가 잘 된 나라로 유명한 핀란드나 친숙한 도시 서울에 비하여 미얀마는 작가에게 관광객의 시선으로 지내다 가는 건 아닐까 하는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이방인임을 부정할 수도 없기에 타자로서의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이들에게 충분한 여유를 주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경청했고, 동시에 그들의 말을 듣는 동안 스치는 풍경과 주변 소음, 날씨,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완성된 두 편의 미얀마 영상에는 네 가지 미얀마 구전동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전동화는 빼앗김보다는 희생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이들이 들려주는 구전동화를 그대로 청취했고, 이 태도는 2008년 핀란드에서 이상적인 닭 농장을 만들어 몽상의 세계라 칭한 <클라우드 쿠쿠랜드>(2009) 때와는 사뭇 달라진 것이다. 당시 작가는 핀란드의 한 농장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닭들을 목격했다. 푸른 하늘과 쾌청한 날씨, 적당히 풀이 덮혀 있고 아무때나 먹을 수 있는 모이가 있는 땅, 이 모든 것들이 농장의 닭들에게 풍요로움을 주는 것 같았다. 이 농장은 예술가들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완벽한 복지의 나라 핀란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소영은 이 농장을 이상적인 닭 농장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직접 인조 이끼잔디와 모형 닭들로 닭 농장을 꾸며서 실제 닭 농장만큼이나 그럴싸해 보이는 농장을 만들고 이를 이상적인 닭 농장이라고 하였다. 가짜 하늘이 보이고, 가짜 바람에 팔랑개비가 파닥파닥 돌아간다. 그러나 화면에 병치되어 있는 핀란드 닭들 때문에 관람객은 옆의 농장이 가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오히려 현실의 핀란드 닭이 허구의 농장으로 끌어들어가는 형국이다.

이때만 해도 이소영의 작업에서는 타자에 대한 개념보다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강했다. 이는 그의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대 때 LA로 건너가서 10년 넘게 미국에서 성장한 그는 그곳에서 캘리포니아 드림을 찾아 이주해온 재미교포, 유학생, 그리고 타민족, 타인종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90년대 LA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교통사고, 지진, 인종 차별 등)을 겪거나 목격했다. 이번 전시에 타일 작업으로 일부 텍스트가 선보이는 “거기, 그 때, 그 오늘”이라는 글은 2015년 4월 어느 아침에 작가가 써내려간 메모이지만, 작가의 캘리포니아에서의 10년을 다룬 내용이다. 교통사고 등 작가가 겪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중첩되어 있고, 아직까지 생생한 그 당시의 생각과 감정이 얽혀 있다. 작가는 그간의 작업에서 미국 생활에 대해 드러낸 적이 없지만, 카자흐스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쓴 메모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미국 체류를 “어딘가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 국가의 보호(감시) 안에 자리잡는 것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로 회상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접하는 질문과 오해가 번거로워 “나는 개인일 뿐이다”라고 답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귀국 후 그는 자신의 몽상의 세계였던 어릴 적 집도 자취를 감추고,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고 또 이를 재촉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숨이 막혔다. 그는 다시 틈만 나면 영국으로, 미국으로, 핀란드로,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여기 아니면 거기, 거기 아니면 여기

2013년 봄, 이소영은 ⟪The Future is Coming From All Directions⟫(175 갤러리, 2013)라는 제목의 전시를 하게 되었다. 이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에서 알게 된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4세 작가 알렉산더 우가이와 공동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인데, 2011년 우가이가 이소영에게 공동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에서 출발했다. 마침 이소영은 국가라는 틀 안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는 것과 삶의 장소를 선택하는 요인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차였는데, 러시아 문화권에서 성장한 우가이와의 문화, 사고 방식 차이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흥미로운 요소가 될 것으로 보았다. 처음 두 사람의 리서치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자료 수집, 국내 거주 중인 고려인 인터뷰 등을 진행했지만 그들이 비로소 작업의 방향을 확정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초기 정착마을인 우슈또베를 방문했을 때였다.

우슈또베에서 이소영은 “우리가 관심을 가진 현재와 미래를 다루려면 역설적으로 과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들은 현지 고려인들의 안내를 받아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를 방문했으며, 우슈또베와 알마티에서 고려인 5세들에게 ‘자리잡기’라는 주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게 될 때의 생존 전략과 독립한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질문했다. 일종의 미래에 대한 구상을 질문 받은 이들의 대답은 한국의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고,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러나 이소영은 이들을 한국의 또래 젊은이들처럼 세계화 속의 젊은 세대로 동일시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에게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냐는 질문도 했다. 그중에는 한국이 궁금해서 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카자흐스탄을 떠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미국, 유럽 등 서구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의 다양한 대답은 소수민족으로서의 희망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입장에서 갖는 희망에 가까웠다. 이들은 새로운 곳에서 다시 타자화 될 수 있다는 것을 괘념하기보다는 이주와 정착을 미래에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이소영은 “다가올 미래에 더욱 자유롭고 빈번해지리라 생각되는 이주의 형태와 삶의 모습 속에서 국가 정체성이 더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소수민족과 소수민 공동체, 디아스포라는 어쩌면 새로운 사회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이리라.

한편,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이 되는 <요새>(2015)는 지난 여름 보안여관을 무대로 다섯 명의 배우를 동원해 촬영한 영상이다. 영상 속에서 이들은 각자 떠나온 곳은 다르지만 이제는 공동운명체에 가깝게 그려졌다. 보안여관의 낡은 건물을 요새로 삼아 이들은 미지의 위험에 대비해 훈련을 하기도 하고, 각자 꿈꾸는 집에 대한 대화,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기 위한 회의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소영은 ‘어디서 살지? 지금 여기가 괜찮은가? 어디에서 죽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배우들에게 던졌으며, 이들 스스로 보금자리로서의 집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살고 싶은 집, 어디에서 죽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배우들이 직접 낸 대답이기 때문에 개인적 의미가 담길 수밖에 없다. 이들 중 실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한지 10년이 된 로빈은 “집에 갔는데 그 자리에 없는 건 뭘까?”라는 질문에 “동네 친구들, 삼촌, 외할머니, 어릴 때 놀던 큰 집 마당, 나무들”이라고 서글프게 답한다. 이들은 모두 로빈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을 만큼 로빈의 정체성과 이어지는 긴밀한 존재들인데, 그는 이제 이들이 모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배우들의 살고 싶은 집에 대한 희망도 제각각이다. 각자 성장한 배경과 추구하는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로빈은 도드라지는 대답을 하는데, “도시에서 멀리, 섬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나는 도시를 뒤돌아서고 싶어.”라고 한다. 다른 이들은 도시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도시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과 달리 그는 고립을 택함으로써 도시의 삶에 의해서 끝없이 타자화됐던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희망을 드러낸다.

이 영상에서 이소영은 이만희 감독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 나오는 “뛰는 심장 위에 훈장을 달아라”라는 대사를 인용한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모티브로 한 듯 보이지만 특정 전투를 명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초반부터 해병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념이나 국가를 위해서라기보다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운다. 어쩌면 이소영은 이 영화를 인용함으로써 보금자리를 국가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하기보다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서의 보금자리를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영상 <요새>에서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당도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비하는 중이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너의 영역>(2014)은 미얀마 양곤의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들을 촬영한 영상이다. 여기에서 개들은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채 도시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벗어나는 일없이 배회한다. 지나가는 행인에게도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이들은 결코 사람 사이에 섞일 일이 없다는 듯 보인다. 사실 이들은 사람들이 장악한 도시의 잉여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채 스스로의 영역을 유지하는 개들을 보고 작가는 서로 다른 존재의 공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공간을 공유하되 서로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은 일정한 거리를 상정한 평행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너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영역으로 잡아들이면서 한국의 우리는 우리(cage)를 만든다. 무기력한 동물들이 맹수로 돌변하기도 하는 그곳, 동물원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또 다른 영상으로 <털 없는 이들의 나라>(2015)가 있다. 라오스 비엔티안 부다 파크에서 촬영한 이 영상은 불교와 힌두교의 무수한 신상들이 털이 없는 매끄러운 몸으로 진화한 상태로 그려진다. 그러나 어느 날 몸에서 “털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 털 때문에 열등해졌고, 부끄러워졌다”는 게 그 내용이다. 이 짧은 우화에서 털은 퇴보의 상징이자 비균질한 구성원을 구분해내는 기준이 된다. 영상은 동물을 모티브로 한 기이한 모습의 신상들을 계속 해서 비춘다. 영상의 기묘한 느낌은 컴퓨터 음성 낭독 앱으로 녹음된 영어 나레이션 때문에 배가된다. 여기에 작가는 영상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도록 자막을 배치했다. 어쩌면 작가는 영상을 배경 화면으로 치부하고 이야기의 언어적 흐름과 행간을 강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는 영상이나 나레이션에 보조적 역할을 하는 자막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역할로 기능하게 만들고 영상은 자막의 행간을 채우게 만든 것이리라.

사실 이것은 그간 우화 형식을 차용한 비디오 작업이든, 인터뷰 영상이든, 병렬 또는 중층 구조의 화면을 제작해왔던 이소영의 또 다른 실험으로 보인다. 그는 그간의 영상들 대부분에서 관람자의 시선이 하나의 화면으로 고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핀란드에서 촬영한 <빼앗기는 것들>(2008)에서는 인터뷰이 등 뒤로 강물이 흐르는 영상을 투사해서 관람자로 하여금 인터뷰이와 배경 화면, 이 중층의 화면을 보도록 하였고, 카자흐스탄에서 촬영한 <자리 잡기>(2013) 역시 3채널 영상으로 구성해서 한 화면에서는 인터뷰가 진행되지만 다른 화면에는 이들이 앉아 있는 극장 좌석 전체를 보여주고, 다른 화면에서는 더욱 확장된 공간, 즉 카자흐스탄에 정착해 살아가는 고려인들의 모습과 삶의 터전을 보여준다. 곰 젤리 영상들도 모두 병렬 분할된 화면이다. 각각의 화면은 상보적이면서 어느 한 화면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 관람자는 동시에 여러 화면을 보면서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야 하며 여러 화면이 아니더라도 인터뷰이의 말과 화면상에 흘러가는 영상을 끊임없이 종합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이소영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인과 관계가 뚜렷하여 선형적으로 흐르기 보다, 끝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왔다갔다 하며 진동한다. 그 이야기에는 털 없는 이들의 매끈한 피부와는 달리 여기저기서 솟아 나오는 털이 있고 밈의 번식이 벌어진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

다시 <요새>로 돌아가 보자. “가자 가자 떠나자, 여기 아니면 거기, 가자 가자 떠나자, 거기 아니면 여기.” 영상의 엔딩송은 이렇게 시작된다. 카자흐스탄을 다녀 온 후의 메모에서 이소영은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를 ‘그곳’이 아닌 ‘거기’ 어디쯤, ‘지평선이 부드러운 거기’로 말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이제 그는 디아스포라를 타자화 할 수 없는, 그들과 시작엔 차이가 있더라도 비슷하게 떠도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카자흐스탄을 다녀온지 3년이 지났고, 이후 라오스, 미얀마를 다녀왔다. 미얀마는 그가 늘 살고 싶은 곳으로 꼽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끝없는 여행의 중간쯤에서 그는 보금자리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생각을 늘어 놓는다. 우리에게 (또한 그에게) 이주는 이미 일어난 일이고 앞으로도 예정된 일이다. 이미 미래는 모든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고, 우리는 여기 아니면 거기, 거기 아니면 여기, 끝없이 떠나는 일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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